온뉴허우 거리 사건: 베트남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

(VOVWORLD) - 올해 8월 19일은 8월 혁명 성공 80주년이자 베트남 인민공안 창설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역사 전반에 걸쳐 베트남 인민공안은 인민안전부와 인민경찰부라는 두 전문 부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조국 건설과 수호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중 ‘온뉴허우 거리 7번지 사건’은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로 평가되며,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존립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 베트민 (Việt Minh) 전선은 기회를 포착해 정권을 장악했다. 바오다이 (Bảo Đại) 황제는 퇴위를 수용했다. 1945년 9월 2일, 역사적인 바딘 광장에서 호찌민 (Hồ Chí Minh) 주석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독립과 자주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갓 출범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당시 중화민국 군대는 연합국 명의로 일본군 무장 해제를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입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권을 전복을 꾀하고, 베트남 국민당(비엣꾸옥·Việt Quốc)과 베트남 혁명동맹회(비엣깍·Việt Cách)를 후원하며 혁명의 성과를 훼손하려 했다.

온뉴허우 거리 사건: 베트남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 - ảnh 1온뉴허우 7번지 사건의 사건 명령 (기록 사진)

장제스(蒋介石) 군대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호찌민 주석은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혁명동맹회가 선거 없이 국회 의석을 확보하도록 동의하고, 두 세력이 참여하는 임시연립정부를 구성해 ‘민족 화합’을 도모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에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혁명동맹회 반동 세력의 야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프랑스와 결탁해 친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1995년, 고(故)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대장(당시 내무부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공안으로부터 프랑스가 국민당과 결탁했고,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당이 장제스 군과 스스로 결탁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호찌민 정부 쿠데타 계획〉은 베트남 국민당 주석 쯔엉 뜨 아인 (Trương Tử Anh)이 다음과 같이 작성했다.

“1946 7 14 프랑스 국경일에 프랑스군이 북부부 청사 앞을 행진할 , 국민당은 흑인 병사 부대에 수류탄을 던져 폭발과 유혈 사태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는 우리가 연합군에 대항했다고 몰아붙이며, 군대를 북부부 청사에 난입시켜 정부 전원을 체포하고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한 , 쿠데타를 선언하고 즉시베트남 국민당 정부 세울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동시에 프랑스 현지에서 호찌민 주석과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표단 일원들도 체포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 발뤼 (Valluy) 장군의 지휘로 추진됐다. 당시 호찌민 주석이 이끄는 베트남 대표단은 프랑스 퐁텐블로 (Fontainebleau)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주석이 국내에 없었던 만큼 정세가 매우 긴박하고 민감했으며,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의 모든 행동은 면밀히 계산되어야 했다. 단 한 번의 부주의한 조치도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회의 자체에도 지대한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온뉴허우 거리 사건: 베트남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 - ảnh 21946년 7월 12일, 반동 국민당 세력을 진압한 핵심 부대인 특별 정찰대 (기록 사진)

인민무장영웅인 당시 내무부 차관이자 중앙 공안국 비서였던 故 응우옌 따이(Nguyễn Tài) 대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 우리는 내부에 정보망을 두고 었기에 그들이 폭동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보고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호찌민 주석께서 프랑스에 계신 상황에서 국내에서 증거 없이 움직이면 문제가 발생할 있으니, 반드시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7월 11일 밤, 베트남 정찰부대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보고했다. 두빈요(Duvigneau) 거리 132번지 소재 본부에서 반동 세력이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정권 전복을 촉구하는 전단 인쇄를 마쳤으며, 이는 7월 12일 아침에 배포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베트남 측은 비밀리에, 그리고 기습적으로 온뉴허우(Ôn Như Hầu) 거리 7번지(현재 응우옌자티에우(Nguyễn Gia Thiều) 거리), 두빈요(Duvigneau) 거리 132번지(현재 부이티쑤언(Bùi Thị Xuân) 거리), 꽌탄(Quán Thánh) 거리 80번지에 위치한 본거지를 동시 급습하기로 결정했다.

중앙의 명령이 내려진 직후인 1946년 7월 12일 새벽 4시 정각,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의 안보 부대는 본거지를 기습·수색해 국민당의 계획과 범죄 행위를 입증하는 다수의 문서와 증거물을 압수했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혁명동맹회의 공개 및 비밀 거점 41곳을 수색하여 300명 이상의 관련자를 체포하고, 모든 반혁명 문서를 압수했으며, 쿠데타 계획이 실행되기 정확히 48시간 전에 이를 완전히 분쇄했다. 또한 다수의 무기를 압수하고, 베트민 간부와 애국 지식인을 납치·고문·살해하는 데 사용된 각종 도구도 발견했다.

온뉴허우 거리 사건: 베트남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 - ảnh 3온뉴허우 7번지 (기록 사진)
온뉴허우(Ôn Như Hầu) 7번지 사건의 승리는 베트남 인민안전부대의 첫 번째 전과로 평가되며, 당시 프랑스 식민세력과 결탁한 반동 정당들의 쿠데타 계획을 무너뜨렸다.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혁명동맹회의 파괴 음모를 성공적으로 분쇄함으로써,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안보 간부들은 민족의 운명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혁명 정권의 존립을 안전하게 지켜냈다.

故 보 응우옌 잡 대장은 이 사건이 혁명에 갖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방첩 활동과 인민경찰의 매우 성과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발뤼(Valluy) 문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세와 결탁하여 쿠데타적 성격의 행동으로 하노이에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반동 세력의 음모를 분쇄했다는 있습니다. 단순히 분쇄하는 그치지 않고, 이번 사건을 통해, 아직도 분별하지 못하던 사람들까지도 어느 세력이 매국 세력인지 뚜렷이 알게 되었으며, 정부의단결대단결정책이 국민으로 하여금 우리를 더욱 지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승리는 인민안전부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민공안 전체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성공으로, 베트남 국민은 베트남 국민당의 배신적인 본색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호찌민 주석의 영도 아래 혁명 정부를 한층 더 굳건히 지지하게 되었다.

해당 사건의 결과와 의의는 다음과 같이 레 반 끄엉 (Lê Văn Cương) 소장(전 공안부 전략연구원 원장, 부교수·박사)의 평가와 일치하다 .

온뉴허우 사건은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 아무리 강대하고 교활한 적이라 할지라도, 호찌민 시대의 베트남 국민은 이를 분쇄할 충분한 능력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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