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년 전인 1911년 6월 5일, 애국 청년 응우옌 떳 타인(Nguyễn Tất Thành) 즉 훗날의 호찌민(Hồ Chí Minh) 주석은 냐롱(Nhà Rồng) 항구(당시 사이공-자딘, 현 호찌민시)에서 아미랄 라투슈-트레빌(Amiral Latouche-Tréville)호에 승선해 조국을 떠났다. 이는 약 30년(1911년 6월 5일~1941년 1월 28일)에 걸친 구국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은 베트남 민족의 역사적 전환점을 알리는 빛나는 이정표이자, 20세기 초 아시아에서 이루어진 글로벌 교류와 접촉 과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베트남 국방전략역사연구소 부소장 응우옌 반 사우(Nguyễn Văn Sáu) 소장·부교수에 따르면, 1911년 6월 5일의 사건은 베트남 민족 해방 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구국 노선의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베트남 민족은 이를 계기로 시대의 발전 법칙에 부합하는 혁명의 길을 찾게 되었다. 1911년 응우옌 떳 타인의 역사적 선택 이후, 베트남 혁명이 연전연승을 거두며 민족 독립과 국가 통일을 쟁취하고, 오늘날과 같은 심도 있는 도이머이(Đổi mới, 쇄신) 정책과 국제 통합을 이룩해 냈음은 역사적 실천이 증명하고 있다.

115년이 지난 지금도 호찌민 주석의 구국 여정이 남긴 가치는 조국 건설 및 수호 위업에 있어 깊은 시의성을 지닌다. 이 사건은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를 결합한 목표의 영구적인 가치를 지속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호찌민 및 당 지도자 연구소의 전 소장인 응우옌 민 쯔엉(Nguyễn Minh Trưởng) 부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베트남은 하나이며, 베트남 민족도 하나이다. 독립과 자유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라는 정신으로 베트남 국가와 민족은 침략 세력을 물리치고 독립과 조국 통일을 수호해 냈으며, 사회주의를 향한 국가 발전의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호찌민 주석과 베트남 국민, 그리고 베트남 공산당이 선택한 혁명 위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베트남은 세계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도약할 것입니다. 호찌민 주석이 독립선언서에서 염원했던 바와 같이, 국민은 독립권과 자유권을 누리며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국제적 관점에서 일본 오사카 대학교의 시미즈 마사아키(Shimizu Masaaki) 교수는 당시 응우옌 떳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호찌민 주석이 식민지 출신이라는 한계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호 주석은 초국가적인 실천적 경험을 통해 서구 사회와 식민지 지역, 그리고 국제 노동자 운동을 직접 관찰했으며, 이는 당시 아시아 시대적 배경에서는 보기 드문 ‘글로벌 비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전했다. 또한 시미즈 교수는 이 사건의 깊은 의의는 근대화와 민족 해방 과정이 항상 실질적인 경험과 국제적 대화를 통한 세계 학습과 맞닿아 있다는 인식에 있다고 설명했다.